Contents
Previous weeks

Politics/Economics
Literature
Culture/Society
Arts
Education/History
Health
Life
Reader's Opinion
Korea Now
Religion
Photo Gallery
Issue Forum

Staff
Writers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미국의 '약속'
저자:  이선명 조회: 2138 발행 일자: 11.04.2011 카테고리: Politics


[워싱턴 모뉴먼트]

새벽의 먼동이 트는 저 빛을 보라

미국의 국가

1절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1절

오, 그대는 이른 새벽녘의 저 빛을 보라.

황혼의 마지막 광휘에 환호하는 우리들의 긍지가

위험한 전쟁 속에서도 광대한 선으로 빛나는 별들과

저 성벽 너머로 찬란히 빛나는 것을.

창공에서 분주한 포탄과 탄환의 붉은 저 섬광들은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리는 증거라.

오, 휘날리는 성조기는

자유와 용맹의 땅에서 휘날리는가!

2절

On the shore, dimly seen thro’ the mist of the deep,

Where the foe’s haughty host in dread silence reposes,

What is that which the breeze, o’er the towering steep,

As it fitfully blows, half conceals, half discloses?

Now it catches the gleam of the morning’s first beam,

In full glory reflected, now shines on the stream

’Tis the star-spangled banner. Oh! long may i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2절

저 깊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에는

교만한 적군이 두려움 속에 말없이 쉬고 있네.

드높이 치솟은 절벽 위로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저 모습이

반쯤 가려진 모습을 드러내고 휘날리네.

이제 아침의 첫 광휘에 휩싸인

찬란한 영광 속 한 줄기 저 빛이여,

우리의 성조기여, 영원토록 휘날리네.

자유와 용맹의 땅에서 휘날리리라!

3절

And where is that band who so vauntingly swore

That the havoc of war and the battle’s confusion

A home and a country should leave us no more?

Their blood has washed out their foul footstep’s pollution.

No refuge could save the hireling and slave

From the terror of flight, or the gloom of the grave,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doth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3절

폐허된 전쟁터와 전쟁의 혼란 속에서

큰 맹세로 노래하던 저 음악대는 어디에서

이제 더 이상 고향과 조국을 떠나지 말 것을!

그들의 피로 사악한 자신의 발자국을 씻어냈도다.

노예 된 자가 어딜 가도 피하지 못하는 것은

패배와 공포와 무덤의 빛이라.

그리고 승리 속의 성조기는

자유와 용맹의 땅에서 휘날리리라!

4절

Oh! thus be it ever, when freemen shall stand

Between their loved homes and the war’s desolation,

Blest with vict’ry and peace, may the Heav’n-rescued land

Praise the Pow’r that hath made and preserved us a nation!

Then conquer we must, when our cause it is just,

And this be our motto: "In God is our trust."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shall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4절

자유인은 어디서나

사랑하는 고향과 황량한 전쟁터에서나

하늘이 구한 이 땅의 승리와 평화로 축복받으리.

우리에게 조국을 지켜 준 저 힘을 찬양하라.

우리는 정당한 대의로 승리했으니

그리고 하느님 안에 우리의 믿음이 있음을 표어로 하여

그리고 승리 속의 성조기는

자유와 용맹의 땅에서 휘날리리라!

미국 국가의 가사 The Star-Spangled Banner를 작사한 Francis Scott Key는 Maryland 주 Frederick County에서 1780년 8월1일 태어나 1843년 1월11일 Baltimore에서 타계했다. 그는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혁명군의 장교였던 John Ross Key의 아들로서, St. John’s 대학에서 수학한 후 그의 숙부였던 Philip Barton Key의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법을 공부하고 Maryland 주의 Frederick 시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워싱턴DC의 검사로 활약했다. 1814년 영국군인 워싱턴을 침공하자, Ross와 Cockburn 장군은 Maryland 주 Upper Marloro의 Dr. William Beanes의 농장에 부대 본부를 설치했다.

Key는 Sir Thomas Cockburn 휘하의 “Surprise”함대로 편입되어 있는 동안 볼티모어를 공격하는 영국 해군과 미국 혁명군이 Fort McHenry에서 밤새 교전하는 것을 관찰하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Key는 먼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새벽에 미국 수비대 Fort McHenry 요새에 성조기가 나부끼는 것을 보고 영국군에 맞서 싸우던 미국 혁명군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이 감동의 시를 썼다.

미국의 조상은 청교도?

1620년 12월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하얀 옷을 입은 경건한 청교도 102명이 상륙했다. 그들은 축복의 땅을 주신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을 다짐했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Mayflower 호였다. 이 낭만적 이야기가 미국의 각급 학교에서 비우는 正史(정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계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기원이고 조상들의 모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메리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래로 10만이 넘는 스페인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유럽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했다. 더구나 그 이전부터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이 5백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의 미국 땅은 아무도 살지 않던 無主空山(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실제로 스페인 사람들은 멕시코를 중심으로 지금의 캘리포니아나 텍사스, 플로리다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무력해진 스페인의 혼란을 틈타, 아메리카 북부에 발을 딛게 된 것은 바로 이때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거의 1백년이 지난 1585년에 월터 롤리라는 영국 사람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허장을 가지고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현재의 North Carolina의 Outer Banks에 위치한 Roanock에 식민지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해에 전염병 등으로 모두 죽었다.

영국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진출을 다시 시도한 것은 또다시 30여년이 지나서였다.

1607년 5월 갓스피드, 수잔콘스탄트, 디스커버리라는 이름의 범선 3척이 버지니아에 닻을 내리고 정착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곳을 James Town이라고 부르고, 이곳에 이민을 계속 받아서 메이플라워호가 Plymounth에 도착할 때 쯤에는 4만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다. 사실 Mayflower호의 원래 목적지가 제임스타운이었다. 배가 풍랑을 만나 엉뚱한 곳에 도착한 것이 Plymouth였다.

“Manifest Destine”

이렇게 시작된 미국은 인구가 급속히 팽창해서 서쪽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이들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神(신)이 약속한 땅을 인디언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의 Oregon과 멕시코의 Texas를 접수할 때부터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곳에는 인디언이 아닌‘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건에는 영국인들이, 멕시코는 스페인인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팽창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e)’이라는 이론이다. 1845년 신문기자인 ‘존 L. 오설리번’이라는 사람이 영토확장론을 옹호한 잡지 『유나이트 스테이트 메거진 앤드 데모크라틱 리뷰』에 ‘해마다 증가하는 우리 수백만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신이 마련해준 이 대륙을 확장하는 것이 우리의 명백한 운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 이념적 기반이 없던 미국인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제 종교적 신념이 그들의 이념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나 마르코 폴로처럼 인도 탐험의 꿈을 키우며 자랐다. 그는 1492년 8월3일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왕의 허락으로 3척의 배에 120명의 선원과 함께 인도를 찾아 항해를 시작한다. 콜럼버스가 탄 배는 100톤 규모의 산타마리아호였고 50톤 규모의 핀타호에는 그의 형인 마르틴 핀슨이 그리고 나머지 한 척인 40톤 규모의 니나호에는 동생인 비센테 핀슨이 선장을 맡았다.

오랜 항해 끝에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육지에 도착하였는데 콜럼버스가 인도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착각한 그 곳은 바하마 군도(지금의 서인도제도)의 한 섬이었다. 이틀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두 번째로 발견한 섬이 쿠바였으며 세 번째로 발견한 섬이 아이티였다. 이렇게 서인도제도를 탐사한 칼럼버스는 1493년 3월 포루투갈로 귀환한다. 그 후에도 1504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멕시코만 남단을 두루 탐험하였다. 그는 이곳이 인도의 서쪽이라고 믿고있었다.

그 후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1499년부터 2년동안 중남미 일대를 두루 탐험하고 돌아와서 '신세계'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썼는데 그는 그 보고서를 통하여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그때까지 콜럼버스가 인도를 발견한 것으로만 믿고있던 전유럽인들은 크게 놀랐으며, 결국 그 신대륙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로 불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무렵에 아메리카대륙에서는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이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메리카에는 정복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는 그러한 정복자들의 식민지로 변하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16세기초기에 시작된 식민활동의 주역은 스페인인 들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만들어 놓은 유럽인의 첫 식민지 산토도밍고를 기지로 삼아 먼저 1509년에는 푸에르토리코를 정복하였고 5년 뒤인 1514년에는 쿠바를 정복하여 그곳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 결과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50여만 명의 원주민들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듯 스페인들은 서인도제도 일대를 그들의 식민활동의 무대로 삼아 북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한다.

아메리카의 “정복”

스페인의 귀족인 헤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년 4월에 500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 상륙하여 1521년 5월에 아즈텍 왕국을 공격하여 쉽게 멸망시켰으며 스페인에서 돼지를 사육하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 정복의 꿈을 안고 스페인 왕 카를르 5세를 찾아갔다가 고작 180명의 병사와 30여필의 말을 얻었지만 그는 1533년 안데스 산중의 대제국인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같은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은 유럽 전역에서 스페인의 국위를 드높였을 뿐 아니라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뿌리를 내리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복자들이 아즈텍 왕국과 잉카제국에서 약탈한 보물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그칠 줄 모르는 정복욕을 갖게 했으며 그 결과 북으로는 현재의 북아메리카 남부까지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

프랑스는 4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위그노 전쟁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종교전쟁이 끝나면서 1584년에 북아메리카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그 결과 1604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식민지 로이얼항이 건설되었다. 프랑스는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센트로렌스강을 따라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연이어 5대호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들어갔다. 1609년에 이르러서는 북부의 퀘벡에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남부에서는 미시시피강 어귀의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영국은 1497년 이탈리아인인 존 캐봇을 파견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하는 등 식민지 건설에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대신 '바다의 매'라고 불리는 영국 해적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귀환하는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전리품들을 얻어냈다.

이 해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프란시스 드레이크였다. 그는 평상시에도 스페인 요새를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리엔 지협에 상륙하여 페루로부터 보물들을 약탈하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해적들을 지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스페인은 1588년 132척의 군함으로 조직된 이른바 '무적함대'를 영국에 보내어 보복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의 반격이 매우 강경한데다 설상가상으로 폭풍우까지 만나 스페인 함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그후 영국은 그러한 약탈사업외에 스페인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7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아녹섬에 여자17명을 포함한 150여명의 이민을 시도했으나 4년 뒤 식량을 실은 배가 그곳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그곳에는 거주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보스턴 학살사건

영국은 1763년 파리조약으로 대서양 연안지대의 광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 동안 인디언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치안을 잘 유지해 오던 프랑스와는 달리 인디언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오타와 족의 추장 폰티악을 중심으로 하는 인디언들의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고 이들과 동맹관계를 맺기까지 수많은 전투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영국정부는 제국의 급격한 팽창과 오랜 전쟁으로 국가 채무가 크게 늘어나자 1764년 식민지인들에게 '설탕법'을 제정하여 과세를 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러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세수입을 늘리기 위해 1765년에 '인지세법'을 추가로 제정한다.

인지세법은 아메리카에서 사용되는 모든 서류에 영국정부의 인지를 첨부하는 것으로 서류종류에 따라 페니로부터 파운드에 이르는 금액으로 그렇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정신적 구속감과 일방적 과세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특히 인지세법은 기존의 포고령이나 설탕법과는 달리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도처에서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매사추세츠의 새뮤얼 애덤스를 중심으로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과격한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식민지 전역으로 확대되어 북부의 뉴햄프셔로부터 남부의 버지니아까지 데모와 폭동이 수없이 일어났다. 각 식민지는 마침내 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회를 소집하였고 회의에 참석한 9개 식민지대표들은 페트릭 헨리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표없는 과세는 없다'는 원칙을 채택하였다.

식민지인들은 국회의원은 자기 선거구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그 선거구에서 직접 대표를 보내지 않은 영국의회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인지세법반대투쟁은 13개 신민지 전역에 파급되어 영국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번지게 되자 영국의회는 1766년 인지세법을 폐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과세 원칙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고 '영국정부만이 식민지인들에게 적용되는 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법'을 제정하여 공표하였다. 그리하여 인지세법이 폐지되고 난 다음해인 1767년에 영국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수입해 가는 원자재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식민지측에서는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으나 영국정부는 더욱 강력하게 법을 집행하게 되고 이러한 조세저항에 대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강압적으로 대응하였으며 결국은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보스턴 학살사건은 영국상품 불매운동과 항의소동으로 보스턴이 무질서상태가 되자 1770년 영국군이 보스턴에 진주하여 강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서 발생하였다. 군중들이 이동 중이던 영국군들에게 야유와 함께 눈덩이를 던지자 흥분한 영국군들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4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1774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영국의 보복조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제 1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1775년 3월에 버지니아 협의회에서 페트릭 헨리는 "이제 식민지에는 자유를 택하느냐 죽음을 택하느냐 하는 양자 택일의 길밖에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보스턴에서는 급진파들이 영국군의 보급품을 압수하고 세관을 점령하였다. 뉴욕에서는 위협을 느낀 영국군이 군함으로 피신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식민지 도처에서 무기고 습격과 폭력이 빈번해졌다.

그런 가운데 1775년 4월 초 영국의 게이지장군에게 '보스턴 교외에 있는 콩코드에 민병대 화약고가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4월 18일 700명으로 구성된 영국군 습격 부대는 스미스 대령의 지휘 아래 콩코드를 향해 출동하였다. 스미스는 야간 기습작전을 개시하여 화약고를 지키고 있던 40여 명의 민병대를 공격하여 8명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민병대의 기습을 받아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것이 바로 아메리카 혁명의 시작이었다.

8. 독립선언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1775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다시 2차 대륙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대륙군 창설에 관한 규정을 정하고 버지니아의 대농장주 조지 워싱턴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신대륙에서 영국의 군인으로서 프랑스군과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공을 세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대륙군의 작전본부를 설치하고 영국군과 대치하는 한편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애덤스 두 사람을 프랑스로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프랑스는 경쟁국인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기와 각종 보급품들을 지원하고 상품교역에 이용되던 선박으로 급조된 대륙해군에게 해군기지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775년 말까지도 대륙회의는 싸움의 목적을 명쾌히 설정하지 못하였다. 사실상 영국본토와의 관계를 끊고 있으면서도 독립선포 문제에 대해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776년 1월에 열린 대륙회의에서 처음으로 독립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었고 6월의 대륙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에게 독립선언서 작성을 위한 초안을 의뢰하였다. 제퍼슨이 작성한 초안에 애덤스와 프랭클린이 약간의 수정을 가한 위원회 안이 6월28일 회의에 제출되었다. 그 후 7월 2일에 헨리 리의 제안을 토의하여 독립의 선언을 가결하고, 이어 재차 수정을 거쳐 마침내 7월4일에 정식으로 영국에 대한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서는 식민지들이 왜 싸우며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중요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정치적 유대관계를 끊고 세계의 모든 국가 사이에서 자연법과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정한 판단은 우리로 하여금 독립을 요청하는 여러 원인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모든 인류는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조물주는 인간에게 몇 가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는 권리를 주었으며, 그 권리 가운데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국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였을 때는 그 정부를 변혁 내지 파멸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미국의 위대성은 “힘”이 아닌 “약속”

이같이 인류 구원의 가치를 천명했던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야만적인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미국 건국의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다. 미국의 초기 개척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개척 사명을 神이 부여했기 때문에, 신이 미국의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후 미국 역사에서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나아가 그 너머까지 미국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1890년대에는 미국 공화당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된다. 그래서 하와이와 필리핀도 운명에 따라 점령하고 중국까지 진출해 명실 공히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George W Bush의 외교정책은 ‘Manifest Destine)명백한 운명’의 21세기 버전이다. 세상을 善과 惡 둘로 나누고 선을 대표하는 미국이 악을 응징하는 사명을 신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에 동의할 리가 없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결국 막대한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된 미국의 ‘명백한 운명’은 제국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의 위대성은 ‘힘’이 아니라 ‘약속’이다. 즉, 그것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구촌 주민 전체가 누릴 수 있도록 도덕적 지도력을 보여주기 바라는 기대치인 것이다.



의견 쓰기
 
  
   
서비스 이용안내
해당 서비스는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지금 바로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회원이 아니시라면 지금 바로 회원등록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