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한지 한달도 않되었을 때이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해서 나는 피난민 속에 끼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향인 원주에 들였드니 가족들은 벌서 산속으로 피난 갔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피난민 속에 끼어서 남하하여 대전까지 갔다. 그러니 미군이 곳 들어올터이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피난민은 말했다. 대전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나는데 유엔(U.N.)군이 복진한다고 해서 나는 유엔군을 따라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원주에서 고등학교시절 미국선교사 에스터 래이어드(Ester Laird) 로 부터 배운 영어회화는 매우 유용했다. 한국이 해방된 후 5년이 지나서 6.25 동란이 일어났으니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치 않았다. 나는 원주에서 해방 후 레이어드 선교사로 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영어회와는 비교적 잘 할 수 있었고 또 히어링 (영어를 듣는 능력)은 매우 익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미군 8군사령부에 통역관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서울에는 1950년 9월18일 (9.18 수복이라고 함) 미군이 입성하였을 때 옛날 서울대 문리과 대학본부에는 미8군사령부가 자리를 잡았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서울여자의과 대학에는 미군 제5공군 사령부가 들어섰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부터 신설동에 있는 서울대학 동창 강신웅 (6.25 후 연락장교로 있다가 서울대 사범대학에 복학하고 졸업함) 집에서 매일 걸어서 미8군 사령부까지 통근 했다.
9.18 수복후에는 정신없이 미8군에서 일하는데 3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전방에서 돌아오는 미군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까지 진격했든 미군이 후퇴할 수 바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드니 군사비밀이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중공군이 한국전에 의용군이라고 불르며 중공 8로군을 파병했기 때문에 한국군과 미군은 당할 수가 없어서 후퇴할 수 바께 없다는 말이다. 아직 군사 비밀이니 소문을 퍼틀이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있다가 12월 말경에 미8군 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드니 한국인 종업원도 함께 후퇴한다는 것이다. 안심은 되었다. 서울대학의 친구 강신웅은 홀어머니를 서울에 남겨두고 자기만 후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중공군이 처 들어와도 신설동의 집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강신웅과 그의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나누고 신설동을 떠났다. 미8군 사령부의 인사과는 한국인 종업원을 승차시킬 화물차를 전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화물차에 타고보니 객실이 아니라 화물을 싣고 다니는 창고열차였다.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에 서울을 떠나라는 미8군의 지시가 떨어젓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화물차를 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남녀종업원을 가리지 않고 다 함께 화물차에 소복이 탓으며 기차는 밤새도록 달리고 또 달려서 그 다음날 새벽에 대구역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민간 고용인(Civilian Emplyee)으로 미 8군사령부에 근무한 시절은 참으로 기억에 남는 일년이었다. 서울에서 피난온 대학생들이 모여서 함께일하고 한국전쟁에 대하여 토론하며 우리의 미래에대한 구상도했다. 미8군 사령부는대구의 대봉동에 있는 경북중학교 교사를 사용했다. 경북중하교 교정을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경비가 매우 삼엄하여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 미8군의 고용원은 정문에서 출입증을 보이고 출근하도록 규칙도 엄했다. 미8군 사령부 정문에는 미군 헌병이 교대로 24시간 수비를 했으며 후문은 주로 화물트럭 만이 출입할 수 있게 수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분증을 정문에서 보이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나는 특히 야간근무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밤에 일하고 낮에는 대구 시내에 나가서 책방에도 들려서 책도 사보고 또 특별강좌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피난온 대학들이 대구에서 개교하고 피난온 학생과 대구에 살고 있는 학생을 위해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피난도시 대구에서 피난한 대학에 등록하고 복학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또 식생활을 해결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사치스러운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영어회하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미국기독교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의 일산동에는 벽돌 양옥집이 3체가 있었는데 하나는 미국 오하이오 웨스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된 “에스터 래이어드” (Ester Laird)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0년대 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또 찰스 스토크스(Charles Stokes) 박사 부부와 벅크홀더 부부는 한국이 해방된 후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고등하교 학생들을 위해 겨울 방학에는 영어회화 크래스를 시작했고 주일날에는 오후2시에 영어예배시간도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 내 기억속에는 아직도 그당시의 영어공부 하던 일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와같이 미국감리교 선교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드라면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실용적인 영어를 배울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을 연결하고 의사소통을 도울 수 있는 체널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당시 성경을 영어로 배우고 영어회화를 자유스럽게 할 수 있었든 것은 에스터 레이어드 (Ester Laird)선교사를 비롯하여, 세디 모어 (Sadie Moore)여사, 미국 애스베리 대학 출신인 챨스 스토크 (Charles Stokes) 부부, 버크홀더 (Buckholder) 부부, 그리고 단기 선교사로 파견된 젊은 스핀드로우 선교사의 덕택이었다고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 깊은 감사의 미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를 가르처 주시고 영어 성경반에 인도해 주신 고등하고 은사님 정태시 선생 (대한교련 사무총창을 거처 공주사범대학 총장 역임), 장재용 선생 (외무부에서 주 뉴욕 총영사, 스페인 대사 역임), 그리고 김기순 선생 (한국외국어 대학 영어교수 역임)의 지도와 편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