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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夏秋冬- 야릇한 恨事(한사)
저자:  변완수 조회: 104 발행 일자: 06.11.2010 카테고리: Literature



실상, 굳이 恨事(한사)랄 것도 없는 일이다. 艶事(염사)는커녕,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나로 말미암아 있었던 것도 아니요, 내 무슨 못할 일을 하여 남의 怨(원)을 산 것도 아니니, 스스로 책해야 할 이유라곤 별로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닥 자책의 念(염)이 이십 여년간이나 부질없는 내 心域(심역)에 무시로 되살아나곤 하는 것이다.

20여년 전인가 보다. 내가 California 주 Long Beach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제나 이제나, 古書店(고서점) 行脚(행각)이 메마른 내 생활의 즐거움이었던지라 내가 가끔 찾아가는 고서점이 있었으니, ‘Acres of Books.’ downtown에서 다섯 불랔 북쪽으로, Long Beach의 중심 도로인 Long Beach Boulevard에 있었다. 아마, 세계에서도 屈指(굴지)의 古書店이었을 것이다. one acre라면, 약 70미터 평방이라, 내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만하니, 다소 허풍을 쳤다더라도 이 ‘Acres of Books’의 크기나 藏書(장서)의 규모를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一瞬(일순), 내 視野(시야)를 가로 막는 書架(서가)와 百萬卷(백만권) 古書(고서). 놀랍다기보다 壓倒(압도)되는 것이다. 우리 秋史先生(추사선생) 예 계신다면, 文字香(문자향) 書卷氣(서권기)만으로도 陶然一醉(도연일취)하실 것이요, 燕岩公(연암공) 여기 듭시면, 아마, 泰西第一好哭場(태서제일호곡장)이라 한 바탕 통곡치 않을 수 없으리라.

내가 첫 날, 무슨 책을 뒤져 보았던지, 어떤 책을 샀던지 전연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Unsung Poets' 'Unsung Novelists'라는 도서 분류 표지였다. 그것은 내겐 충격이었다. 아, ‘Unsung Poets' 'Unsung Novelists'라니. 20여년이 지난 오늘은, 이른바 'Unsung Hero'니 뭐니해서, ‘unsung'이란 말이 賤俗(천속)한 유행어가 되고 말았으나, 그 날 그 때까지 ‘Unsung Poets' 'Unsung Novelists'란 용례를 들어 본적도 없었거니와, 이런 식으로 분류하여 불우한 文筆人(문필인)의 책만을 따로 모셔 놓은 古書店을 오늘까지도 나는 본적이 없다.

이제, 한 'unsung novelist'의 悲話(비화)를 소개해 본다. 한 불운의 소설가 哀話(애화)를 적어 본다.

백발이 星星(성성)한 初老(초로)의 신사. ‘Acres of Books’의 단골 손님이시다. 옷은 단정히 입고 있으나 그의 窮色(궁색)은 감출길이 없다. 이름은 Charlie로 통한다. 아무도 그의 full name을 아는 이가 없다. 그는 매일 이 고서점에 온다. 주 7일, 일년 열 두 달 ,삼백 예순 날,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대개 매일 아침, 문을 여는 종업원과 같이 서점에 들어선다. 그는 도시 말이 없다. “Hi, Charlie"하면, “Mormin'”할 뿐.

서점에 전등이 모두 켜지기도 전에 그는 성큼성큼 서점의 동북쪽 구석으로 걸어간다. 'Unsung Novelists' section이다. 즉 무명 소설가의 소설만을 모셔둔 곳이다. 이 section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는 robot 모냥 매일 일정한 자리에 멈칫 섰다가는 획 돌아 선다. 돌아 올 때의 걸음 걸이는 의례 갈 때 보단 힘이 없다.

Charlie는 소설가란다. 단 한 권의 소설을 냈을 뿐, 한 말로, 빛을 보지 못한 悲運(비운)의 소설가다. 이야말로 'unsung novelist'다. 언제 출판한 것인지, 어떤 경향의 소설인지, 그리고 그 소설의 題名(제명)조차 아는 이가 없다. 그 제명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 Charlie 뿐이다. 그 소설이, 그 단 한 권의 소설이, 이 ‘Acres of Books’에 있다. 즉 'Unsung Novelists' section에 秘藏(비장)돼 있는 것이다. 어느 書架(서가), 어느 칸, 몇 번째에 꽂혀 있는지 Charlie는 안다. 매일 아침 와서 보고 가기 때문이다.

그 책이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없어지기를 바라 오는 것이다. 행여, “누군가 사 갔으려나.”하고 매일 온다. “어쩌면 오늘은...” “행여나 누군가...” 하고 Charlie는 왔다간 돌아가기 몇 년이었던가. Charlie도 이젠 모른다. 그는 曆日(역일)을 잊은 지 오래다.

이상 episode는 나의 飜案(번안)이다. 20여년 전, L.A. Times 기사를 본 내 퇴색한 기억을 더듬어. 나는, Charlie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소매라도 스친 인연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이 異邦人(이방인)을 잊을 수가 없다. 때로 나는, 남의 말 하듯, 나를 꾸짖는 것이다. “애끼, 이 인색한 사람. 진작 그 책 한 권 사줄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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